[컬럼/논단] 해군사관학교, 전남 여수로 이전하자...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혼이 부른다
[박영신 호남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지난 9월 6일자 본지에 필자는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육군사관학교가 수도권 인구 분산정책에 따라 지방 이전 계획이 수립된 것으로 알고, 그동안 유치경쟁에 뛰고 있는 충남 계룡시와 경북 영천과 안동시 보다는 아시아 최대의 군사교육시설이자 육군의 요람인 상무대가 있는 전남 장성이 가장 적합한 곳이라 생각한다며, 전남 장성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이전하라는 글을 써서 약 8만 3천여 명의 필자 구독자와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 서삼석 호남발전특별위원장, 이병훈 호남특위 광주수석부위원장, 김성 전남수석부위원장에게 보냈다.
그리고 이번엔 현재 경남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해군사관학교를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혼이 살아 숨쉬는 전남 여수로 이전하자는 배경과 당위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육군사관학교는 수도권 인구 과밀해소와 지역 균형발전 차원에서 이미 지방으로의 이전이 확정되어 육사를 전남 장성으로 가져 오는것은 쉽게 이뤄질 것으로 낙관한다.
그러나 육사 이전에 비해 해사 이전은 어려울 수도 있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해군사관학교를 전남 여수로 끌어오는 데는 여러가지 난관이 예상되기 때문에 이번엔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1부와 2부로 나눠 게재한다.
<제1부> 이순신 장군과 여수의 역사적 배경 고찰
전남 여수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건조하고 수리하던 유서 깊은 사적 제 392호 선소 유적지가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부임,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한 때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됐던 국보 제 309호 '진남관'이 있는 곳이다.
이외에도 현재 이곳에는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했던 굴강, 칼과 창을 갈고 닦았던 세검정, 수군지휘소였던 선소창, 수군들이 머물렀던 병영 막사, 거북선과 판옥선을 매어 두었던 계선주, 칼과 창을 만들던 풀뭇간, 왜군들의 활동을 살피던 망해루, 말과 수군이 훈련하던 망마기마대, 창을 던지고 활을 쏘는 연습장인 궁장사, 조선수군의 통행표시인 벅수(석인) 등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혼이 서린 다양한 관련 유물들이 남아있다.
임진왜란으로 풍전등화와 같이 백척간두에 선 이나라 조선을 구해낸 곳이 호남이 아닌가? 이미 영화로도 만들어져 역대급 흥행 1위인 1,761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명량해전' !
이 해전은 단 12척의 배로 적선 330척을 물리치고 도망간 배가 겨우 10여척에 불과한 세계 해전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실로 기적적인 승리였다.
이 날 물리친 적군의 수는 모두 2만여명에 이르며 조선 수군의 사망자는 단 10명(부상자 3명)에 불과했다.
이순신장군이 선조 임금에게 올린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비록 우리의 배가 수는 적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얕보지 못할 것이옵니다" 라고 그 유명한 장계를 올린 곳이 바로 전라도 명량(울돌목)이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이 말씀 역시 '명량해전' 전날 병사들에게 장군이 수적 열세(12척:330척)를 극복하기 위한 '정신훈화' 과정에서 나온 말인데, 그 기적적 승리의 바탕이된 곳이 바로 명량 앞바다이다. 동서고금의 찬란한 역사를 만들어낸 곳이다.
오죽하면 일본 메이지 해군들이 이순신장군의 '명량해전'을 연구하다가 기절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천혜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장군의 지략이 숨어있는 곳이다.
당시 일본군은 이순신의 파직과 원균의 패전으로 인해 한산에서 여수까지 제해권을 확대하고 수륙병진을 통한 도성 장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명량대첩'은 바로 그 일본군의 전략을 모조리 무산시킨 일전이었을 뿐만아니라, 이순신과 휘하 장수들, 그리고 이름없는 군사들과 백성들, 그들의 강인한 투지와 저력이 이루어 낸 쾌거였다.
또한 이후, 정유년에서 무술년으로 이어진 수군재건과 23전 23승에 빛나는 이순신의 전승신화, 그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세계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이러한 압도적 '전승'이 또 어디에 있었던가? 그 유명한 '트라팔가르'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도 '명량해전'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는 초라한 성적표의 해전에 불과했다.
1805년 10월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 함대를 격파하고 영국 넬슨 제독의 승리로 끝난 '트라팔가르' 해전이나, 1942년 6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계속 밀리는 처지에 있던 태평양 전쟁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된 미국이 태평양 제해권을 지키는데 큰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받는 '미드웨이해전' 역시 승리를 가져오는데 있어 막대한 아군의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반면에 이순신장군의 '명량해전'은 고작 10명의 사망자를 빼곤 거의 완벽한 승리였다.
세상천지에 330 여척의 일본군 함대를 몰살 시키는데 아군의 사망자가 기껏 10명이라니 아무리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키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영화도 이보다 더 극적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정녕 역사 교과서에 나오니까 믿는 것이지 이걸 누가 믿겠는가? 지금 전 세계 해군사관학교에서는 '명량해전'이 교재로 채택되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대승을 거둔 '명량대첩'에 대해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해군사관 학교는 어디에 있어야 하겠는가? 바로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혼이 살아 숨쉬는 이 곳 전남 여수에 있어야 한다.
호남 중에서도 여수(麗水)는 ‘아름다운 물’이란 뜻이다. 섬이 점점이 떠 있고 산들이 둘러선 여수는 바다가 호수다. 여수 아닌 다른 곳이 여수라는 이름을 가지고는 부끄러울 법하다.
이 곳, 아름다운 물의 도시 여수에 세계해전사에 빛나는 23전 23승!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혼이 살아 숨쉬는 이 곳, 여수에 처음부터 해군사관학교가 세워져야 했다.
여수에는거북선을 만들던 '선소'가 있다. '선소' 에서 건조한 거북선을 거느리고 이순신 장군이 호령 하던 곳이 바로 푸르고 푸른 남해바다 여수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고 이순신 장군과 함께 의로운 피를 뿌렸던 여수 민초들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곳 여수, 이 아름다운 물! 여수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여수에 해군사관 학교가 반드시 이전되어야 한다.
충무공의 혼이 배고 스민 곳이 여수요! 충무공의 기개가 서린 땅이 여수다. 여수가 이순신이고 이순신이 여수인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고뇌와 수심이 깊었던 '삼도수군통제영'의 여수에서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의 중국 대륙진출을 좌절시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지켜낸 곳이 호남이다.
일본과의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전란을 종결지었고 마지막 전쟁에 이르기까지 극도의 전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 곳이 호남이다.
세계 해전사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23전 23승의 전쟁 신화! 씩씩한 기상과 호쾌한 기백이 웅혼하게 천지를 진동하는 곳이 여수 종고산이요, 그 산자락에 '삼도수군통제영'의 본거지 '진남관'이 우뚝 서 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의 실질적인 최고 지휘관으로 지금으로치면 군령권을 가진 해군참모총장이 해군작전사령관을 겸하는 것이다.
바다호수를 가르며 우뚝 솟은 종고산의 종소리,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여수 선소에서 출발한 거북선이 바다호수를 가른다.
병력과 화력면에서 절대적으로 앞서 있던 왜군이 거북선을 앞세우며 긴 칼 옆에 차고 '삼도수군통제영' 에서 지휘하는 이순신장군의 호령 소리에 혼비백산하던 곳이 바로 여수 앞바다이다.
혹자는 해군사관학교를 전남 여수로 이전하면 경남 창원시 진해에서 가만 있겠냐고 우려를 표한다.
그러나 "호남발전특위"는 여러가지 고증과 검증을 거쳐 여수지역민들과 호남민들의 뜻을 경청해서 이재명 대통령과 정청래 당대표 에게 건의하면 그만이다.
'호남'에 빚진 자로서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두고 보면 알 것아닌가? 서울이 무섭다고 왜 과천에서 부터 빌빌 기려고 하는가?
필자는 이재명 대통령과 정청래 당대표가 호남민의 특별한 희생에는 특별한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천명한 그 말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해군사관학교는 군사 시설이며 그 상급부대가 해군본부이다.그렇기 때문에 군령권을 가진 국방부장관이 해군사관학교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해군참모총장에게 해사 이전 지시를 내리면 그만이다.
'호남발전특위'에서는 호남을 위해 '사활'을 걸고 전쟁을 치루는 장수의 심정으로 싸워야 한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시절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48년 10월 일어난 여순사건을 국가폭력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73년만인 지난 2021년 6월 '여순사건특별법'이 제정 되기전 까지 오랜 세월 여수는 여순 반란사건 이란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한 맺힌 도시로 살아 왔다. 아름다운 물의 도시 '여수'가 어찌 반란의 도시란 말인가?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함께 거북선을 만들며 장군의 수족이 되어 남해바다를 지켰던 순박한 여수사람들의 애국애족정신이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물의 도시 여수에 반드시 해군사관학교를 이전시켜 여수시민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반드시 역사의 부름에 응답할 시간은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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