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정신이 살아있으면 나라가 산다...고려 500년 역사의 최고 개국공신

평산(平山) 신(申)씨 시조 장절공 신숭겸(申崇謙) 장군의 유적지인 전남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에 있는 덕양서원(德陽書院)은 1589년 선조 22년에 곡성현감 신옥과 전라도관찰사 이광의 노력으로 지역유림과 함께 창건한 우리나라 초기 서원이다.(사진=신인현 도유사)
평산(平山) 신(申)씨 시조 장절공 신숭겸(申崇謙) 장군의 유적지인 전남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에 있는 덕양서원(德陽書院)은 1589년 선조 22년에 곡성현감 신옥과 전라도관찰사 이광의 노력으로 지역유림과 함께 창건한 우리나라 초기 서원이다.(사진=신인현 도유사)
안경환 베트남 응우옌짜이대학교 대외총장
안경환 베트남 응우옌짜이대학교 대외총장

[안경환 박사/베트남 응우옌짜이대학교 대외총장] 충의정신이 살아있으면 나라가 산다. 한민족의 역사에 왕을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충신이 있다. 바로 신라 말 고려 초에 고려 태조 왕건의 목숨을 구한 장절공 신숭겸(申崇謙) 장군이다. 평산(平山) 신(申)씨 시조인 장절공 신숭겸(申崇謙, ?-927) 장군은 한민족 역사에서 두 번째 통일 위업을 달성한 고려 500년 역사의 최고 개국공신이다.

신숭겸 장군은 궁예(弓裔: 869-918)가 건국한 태봉국의 기병 대장군으로,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에서 탄생했다. 장군은 918년 왕건과 함께 고려를 개국했으나, 927년 왕건이 대구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 견훤(甄萱, 867-936)의 군대에 포위당하자, 태조 왕건의 갑옷으로 바꿔 입고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신숭겸 장군이 왕건의 갑옷을 입고 위장술을 펼치는 동안, 왕건은 견훤 군대의 포위망을 벗어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 장절공의 기지로 목숨을 건진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초석을 다져 936년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했으며, 고려 500년의 왕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신숭겸 장군이 위왕대사한 팔공산 전투 당시의 정치 상황은 이러했다. 신라는 B.C 57년부터 경주를 중심으로 A.D 935년까지 56명의 임금이 992년간이나 이어온 동양에서 최장기 왕조국가이다. 51대 진성여왕이 887년부터 10년간 집권하는 동안 신라왕조의 통치 권력이 약화되면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견훤이 892년 후백제 부흥을 부르짖으며 광주(무진주)를 점령하였고, 궁예는 견훤보다 1년 먼저 고구려의 부흥과 신라 타도를 목표로 죽산(죽주)을 장악하였다. 두 사람이 모두 스스로 임금이라 칭하니, 신라·후백제·후고구려의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후삼국 시대는 935년 왕건이 천하를 통일하여 고려의 새 군주가 되기까지 44년간이나 지속되었다. 후고구려를 건립한 궁예의 세력이 날로 강대해지자,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고쳤다가 911년에 다시 태봉(泰封)으로 바꾸고, 스스로 미륵불이라 하며 도읍지를 옮기고 학정을 일삼았다. 이에, 궁예의 휘하에 있던 장졸들이 그를 축출하고, 왕건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왕건은 개경(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였다.

당시 고려 왕건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있었고, 견훤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신라를 공격하였다. 견훤이 927년 11월 팔공산 전투가 있기 전, 9월에 경주의 관문인 영천(고울부)을 공격하자 신라는 고려에 긴급 원병을 요청하였다. 왕건의 군사가 도착하기 전에 경주를 먼저 점령한 견훤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즉위시켰다. 왕건은 군사 5천을 이끌고 경주로 내려가는 도중에 팔공산 동수에서 견훤의 군사와 대접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견훤의 군사에 포위되어 생명이 위급하게 되었다. 8명의 장수가 전사하고 5천 명의 군사들도 대부분 전멸하였다. 이때 신숭겸 장군이 왕건과 옷을 바꿔 입고 싸우는 동안 왕건은 적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신숭겸 장군은 전력을 다했으나 중과부적으로 견훤의 군사에 잡혀 결국 목이 잘리고 말았다.

왕건은 춘천 비방동 화악산에 신숭겸 장군의 머리를 금으로 대신 만들어 예장하였다. 잘려진 머리는 신숭겸 장군의 애마(愛馬)가 물고 고향에 있는 동리산(桐裏山)으로 달려와 슬피 울었다 한다. 이를 기이히 여긴 태안사 스님들이 올라가 보니 같이 동문수학하던 장절공의 머리를 말이 물고 온 것이었다. 이에 스님들이 비밀리에 장례를 치르고 매장하였다. 곡성이 견훤이 다스리는 지역인지라 고려 장군의 장례를 공공연히 치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팔공산은 원래 공산(公山)이었으나, 8명의 장수가 이곳에서 전사했고, 8개 산봉우리가 8명의 장수를 상징한다하여 팔공산으로 하였다 한다. 대구의 왕산(王山)은 현재 신숭겸의 사당 표충사가 있는 뒷산으로,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왕건이 몸을 피신했던 산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평산(平山) 신(申)씨 시조 장절공 신숭겸(申崇謙) 장군의 유적지인 전남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에 있는 덕양서원(德陽書院)은 1589년 선조 22년에 곡성현감 신옥과 전라도관찰사 이광의 노력으로 지역유림과 함께 창건한 우리나라 초기 서원이다. 호남지역에서는 월봉서원(1578년 창건) 다음으로 오래된 역사를 지닌 전남지역의 3대 사액(賜額)서원이다. 덕양서원은 1695년 조선 숙종21년에 ‘德陽(덕양)’이라는 이름을 받은 사액서원으로, 1981년 전라남도 지방문화재 56호로 지정되었다.

이처럼 장절공이 태조 왕건을 위해 목숨을 바쳐 고려 왕조가 이어져 왔고, 민족정신이 계승되었다. 장절공의 고매한 충의정신을 고양하는 것은 국운을 번성하게 하는 산 역사 교육이 될 것이다. “신숭겸 장군로”는 곡성군의 신숭겸 장군 태생지에서 압록까지, 춘천의 묘역 앞 도로와 대구의 표충사 앞 도로 3곳이 지정되어 있다. 정절공의 얼을 되살린다면 한반도 통일을 앞당기는 도화선이 될 것이다. 덕양서원을 성역화하고 사관생도, ROTC, 경찰관, 소방관, 공무원 교육장으로 활용하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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