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 사상’은 곧 베트남 민족정신...베트남 독립투쟁과 민족통일에 일생 바친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 주석의 통치이념 “바(3) 꿍(함께) 정신”...국민과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자는 공동운명체 정신

12월 22일은 한국과 베트남이 지난 1992년 외교관계를 수립한 지 28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과 베트남은 1992년 12월 22일 베트남 전쟁 종전 17년 만에 정식으로 수교관계를 수립한 바 있다. 특히 올해는 베트남 민족영웅인 호찌민(Hồ Chí Minh)이 탄생(1890년 5월 19일)한 지 130주년이 되는 해다. 이 뜻 깊은 해가 저물어가는 즈음에 인간 호찌민과 그의 사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통해 한국과 베트남 양국의 미래 발전과 우호증진을 위해 <특별기고>와 함께 관련 영상을 게재한다.(편집자 주)

베트남 국부 호찌민 주석(1890.5.19-1969.9.2)
베트남 국부 호찌민 주석(1890.5.19-1969.9.2)

[한국지방정부신문=안경환 편집주간] 세계 어느 나라든지 후손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위대한 인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한국 역사의 범상한 인물로는 신라시대의 원효(元曉)대사, 고려시대의 신숭겸(申崇謙) 장군, 최영(崔瑩) 장군, 조선시대의 이순신 장군, 다산 정약용(茶山 鄭若鎔), 그리고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선생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한다면, 베트남의 대표적인 인물은 호찌민(1890.5.19-1969.9.2) 주석이다.

호찌민은 국가주석으로 24년간 재임하는 동안 국민의 힘을 결집시켰고, 근검절약을 요구하여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였고, 민족 통일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호찌민 주석의 통치이념은 국민과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자는 이른바 "바꿍(Ba Cùng) 정신“이다. 베트남 말로 Ba(바)는 ‘셋(3)’이라는 뜻이고 Cùng(꿍)은 ‘함께’라는 의미다. 즉 3가지(일하고, 먹고, 자고)를 함께 한다는, 공동운명체 정신을 뜻한다.

이처럼 베트남의 역사를 새로 쓴 호찌민 주석은 통치의 개념을 “다스림”이 아니라 국민과 항상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호찌민 주석의 일대기는 바로 베트남의 현대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고, 베트남을 움직이는 힘이 바로 호찌민 사상이다.

베트남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인민일보는 호찌민 주석을 <베트남 민족의 표상>이라고 하였다.

UNESCO에서는 1990년에 호찌민 주석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호찌민을 “베트남 민족해방의 영웅이자 세계적인 문화인”으로 공인하였다.

 

호찌민 주석의 성은 응우옌(阮)씨...생전에 무려 174개 이름 사용

호찌민 주석은 애국, 애족, 애민 사상의 화신이다. 호(胡) 주석은 프랑스 식민지배로부터 조국의 독립과 조국의 완전한 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쳐 독립을 이루고 통일의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어릴 적부터 프랑스 식민시대의 혹독한 압박 속에서 성장한 호찌민 주석은 노예의 처지에 있는 동포들의 참상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온 몸을 희생하며, 결혼도 마다한 채 평생 독신으로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호찌민 주석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날로 더해가고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호찌민 주석의 성이 <호>씨, 이름은 <찌민>으로 알고 있다.

호찌민이란 이름은 호찌민 주석이 생전에 사용하던 무려 174개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호찌민은 1901년 나이 11살 때 부친이 지어준 '응우옌신꿍(阮生恭)'이라는 이름을 '응우옌떳타인(阮必成)'으로 개명하기 시작하여, 1969년 서거하기까지 무려 174개의 가명과 필명을 사용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프랑스 식민당국으로부터 체포를 피하기 위해서 수시로 이름을 바꿔 사용했기 때문이다.

호찌민 주석은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인 1890년 5월 19일 응에안성 남단현 낌리엔리 샌 마을의 조그만 오두막집에서 3남1녀의 셋째로 태어났다.

하노이 역을 떠나 남쪽으로 약 7시간가량 달리면 빈(Vinh)역에 이르고, 하차 후 다시 서쪽으로 약 20km정도를 더 가면 호찌민 주석의 소박한 고향, 연꽃마을이 나타난다.

호찌민 주석이 태어난 집은 조그만 초가집에 대나무 침대와 베틀이 고작이었고, 텃밭에는 구황작물인 고구마가 심어져 있고, 코코넛 나무 몇 그루 서있는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가난하고 초라한 집에서 어떻게 베트남 역사상 최고의 인물이 탄생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호찌민(胡志明)’이란 이름은 1942년 8월 27일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국경을 넘어 갔다가 광시(廣西)성에서 당시 장제스 장군의 국민당 군대에 체포되었을 때 소지하고 있던 신분증에 기재되었던 이름이다.

이를 계기로 ‘호찌민’이란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이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계속 사용한 이름, 평생에 가장 오랜 기간 사용한 마지막 이름이 되었다.

3남1녀의 셋째(막내 동생은 어려서 사망)...30년간 해외서 독립운동

호찌민 주석은 3남1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막내 남동생 응우옌신뉴언(Nguyễn Sinh Nhuận:1900–1901)은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였다. 호찌민 주석은 11살에 어머니 호앙티로안 (Hoàng Thị Loan:1868–1901) 여사를 잃었다.

부친 응우옌신삭(Nguyễn Sinh Sắc:1862–1929, Nguyễn Sinh Huy 라고도 함)은 조선에서 동학혁명이 발생한 1894년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프랑스 식민정청의 고위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프랑스인의 야심을 채워 주기 위한 도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고위 관리직을 사양하고 시골학교를 자원하여 근무하였다. 나중에 프랑스 식민당국에 의해 벽지로 좌천되었다가 재임 중 프랑스 법을 어긴 베트남 동포를 관대히 처분하였다는 이유로 파면 당했다.

이로부터 응우옌신삭 공(公)은 가족을 떠나 방랑생활을 하면서 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하며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프랑스 식민시대 관료제도에 환멸을 느낀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학교 정규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아, 호찌민 주석은 후에 소재 국학교(중학교 과정) 졸업이 최종 학력이었다. 대신 많은 독서량으로 어려서부터 폭넓은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호찌민 주석은 1911년 6월 5일에 21세의 나이로 자신의 민족주의적 야망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후원자를 찾기 위해 해외로 나가기로 하고, 사이공 항구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상선 <아미랄 라뚜쉬 뜨레빌 : Amiral Latouche Treville>호의 보조 요리사로 승선하여 프랑스로 갔다.

이때부터 30년간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호찌민 주석만큼 많은 직업을 가져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원사, 미화원, 석탄불을 때는 화부, 조리사 보조원, 사진사, 중국 골동품 그림을 그리는 모조 화가 등등, 생계유지를 위해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직업을 가져 보았고 숱한 고생을 했다.

화부로 있을 때는 불에 달군 벽돌을 가져다 침대 밑에 깔고 자면서 추위와 싸우기도 하였고,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이라고는 다 겪어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호찌민 주석이야 말로 눈물의 빵이 아니라 피의 빵을 먹어본 사람이고, 옥중생활로 자유의 소중함을 알고 배고픈 국민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영도자였다.

호찌민 주석은 직업 혁명가...호찌민의 핵심 사상은 근면, 검소, 청렴, 정직, 지공무사(至公無私)

그에게 평생을 따라 다닌 질문이 있다. 호찌민은 공산주의자인가? 아니면 민족주의자인가? 라는 질문이다. 호찌민 주석은 스스로 자신을 ‘나는 직업 혁명가’라고 말했다.

호찌민 주석은 노예와 같은 식민지배로부터 독립과 자유를 되찾기 위해 공산주의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은 민족주의자다. 또한, 봉건군주제를 타파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던 혁명가다. 그는 근면, 검소, 청렴, 정직과 지공무사(至公無私)를 신조로 삼았고 이것이 호찌민 사상의 핵심이다.

호찌민 주석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위해 구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54년 프랑스로부터 독립 후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을 통일시키기 위해 미국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는 남부의 ‘베트남공화국’을 무력으로 통일하였다.

남부 베트남을 지원한 미국은 연인원 314만 명의 미군을 참전시켰고 58,183명이 전사했다. 미국이 쓴 전쟁 비용만 무려 1,650억 달러에 이른다.

“독립과 자유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주창하며 국민들을 단결시킨 호찌민 주석의 위대한 영도력이 통일을 달성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고, 베트남 역사에 전쟁불패의 신화를 다시 한 번 쓰게 하였던 것이다.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 정복 통일 후 호찌민시로 개명, 민족영웅의 도시로 재탄생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인 1975년 4월 30일 오전 11시 30분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시) 중심부에 있는 독립궁에 북베트남(월맹)기가 게양되었다.

이로써 인도차이나 반도에 1954년 제네바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 이남에 들어섰던 친미정권이었던 ‘베트남공화국’은 역사의 뒤편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통일을 지상과제로 삼았던 베트남 독립과 통일의 구심체인 호찌민 주석이 사망한지 6년 만에 통일의 꿈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베트남 정부는 통일 다음해인 1976년 7월 2일 남부 ‘베트남공화국’의 수도 ‘사이공’을 그의 이름을 따서 '호찌민시'로 변경하였다.

호찌민 주석의 리더십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한 나라가 위대한 지도자를 갖는다는 것은 그 나라의 생존과 흥망성쇠에 매우 중요하며, 지도자는 그 나라 국민의 행복지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호찌민 주석은 매사에 솔선수범하고, 국민과 더불어 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 같이 자는, 소위 '바꿍 정신'으로 국민과 더불어 생사고락을 하면서, 국가의 미래를 전망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지도자였으며, 국민과의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는 지도자였다.

호찌민 주석은 조국의 독립과 자유,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평생을 바쳐서 결국 베트남 국민의 자부심이 되었다.

호찌민 주석의 '옥중일기' 표지
호찌민 주석의 '옥중일기' 표지

베트남의 문호이자 국제적 감각을 지닌 정치가...‘옥중일기’는 베트남의 보물

호찌민 주석은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태국어, 3개의 중국 방언을 구사할 줄 아는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정치지도자였다. 그는 또한 베트남이 낳은 문호이기도 하다.

호찌민 주석은 1942.8.27 중국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군대에 의하여 체포되어 중국 광시(廣西)성 13개 현(縣)의 18개 감옥을 전전하면서 1943.9.10까지 380일간 옥살이를 하면서 옥중에서 쓴 133편의 한시집인 “옥중일기(獄中日記)”을 남겼다.

‘옥중일기(獄中日記)’는 베트남 사람이 베트남어가 아닌 당율(唐律)에 따라 쓴 한시집이다. ‘옥중일기’를 통해서 베트남의 민족지도자가 감옥에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조국만을 생각하는 애국정신 그리고 극한 상황에 처해서도 여유로움을 잃지 않는 해학적 사고방식, 겸손한 인간성은 물론 동서양을 넘나드는 그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베트남 정부는 2012년 10월 1일 ‘옥중일기’를 국가보물로 지정하였다.

‘옥중일기’의 권두시는 그의 대범함과 조국 독립의 대업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나타내주고 있다.

身體在獄中(신체재옥중) - 몸은 옥중에 갇혀있으나,
情神在獄外(정신재옥외) - 마음만은 갇힐 수 없도다.
欲成大事業(욕성대사업) - 큰 사업 이루려 할 진대,
精神更要大(정신갱요대) - 마음도 더욱 키우리라.

중국 광시(廣西)성에서 수감생활을 할 때는 영양실조에 걸려 이가 다 빠지고, 지독한 옴에 걸려 온몸이 비단구렁이처럼 울긋불긋하고, 이불이 없어서 추위를 면하기 위하여 신문지를 서로 엮어 종이이불(紙氈)을 만들어 덮고 자는 등 그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이겨낸 철인이었다.

이러한 역경을 통해서 조국의 독립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고, 자신이 출옥만하면 나라를 세워 어떻게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 줄 방법만을 연구하였다.

안경환 편집주간이 번역해 한국에 최초 소개한 '호찌민 옥중일기' 표지
안경환 편집주간이 번역해 한국에 최초 소개한 '호찌민 옥중일기' 표지

다음은 그의 ‘옥중일기’에 있는 ‘파자’시를 소개한다.

折字(절자)
囚人出去或爲國(수인출거혹위국)
가둘수(囚)에서 사람인(人)을 빼고 혹혹(或)이 들면 나라국(國)이 되고
患過頭時始見忠(환과두시시견충)
근심환(患)에서 머리의 가운데 중(中)을 제하면 충성 충(忠)이 보인다.
人有憂愁優点大(인유우수우점대)
사람에 근심이 있음으로 넉넉함이 더하는 것이니,
籠開竹閂出眞龍(농개죽산출진용)
대그릇농(籠)에서 대죽(竹) 빗장이 풀리면 진짜 용(龍)이 나오리라.

1943년 출옥한 지 2년 후에는 그가 쓴 시의 내용 파자(破字)대로, 옥에서 나와 1945년 9월 2일 독립을 선포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세워 진짜 용(龍)이 되었다.

그는 나라를 세우고 완전한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전쟁을 치렀다. 55일간의 전투 끝에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승함으로써 독립을 되찾았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의 승리는 현대사에서 아시아(동양, 황인종, 베트남) 민족이 유럽(서양, 백인종, 프랑스)국가를 상대로 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최초의 전투였다. 프랑스로부터의 독립과 베트남의 통일은 전적으로 국민을 단합시킨 호찌민 주석의 지도력에 기인한 결과였다.

호찌민 주석은 국가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몸소 실천한 지도자였으며, 국민과의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는 근면, 검소, 청렴, 정직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지도자였다.

베트남의 5천년 역사를 새로 쓴 호찌민 주석은 “독립과 자유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각인시켜 준 인물이요, 국민을 위해 온 몸을 바친 지도자며, 베트남의 인동초(忍冬草)같은 인물이다. 호찌민 주석의 사상이 살아 있는 한 베트남은 독립국가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안경환 본지 편집주간
안경환 본지 편집주간

안경환 본지 편집주간은 195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충주고를 졸업하고 한국외대에서 베트남어를 전공했으며, 베트남의 국립호찌민인문사회과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어문학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베트남의 외국인 1호 언어학박사다.

베트남 국부 호찌민의 ‘옥중일기’를 번역해 한국에 최초로 소개했다. 베트남 정부로부터 친선문화진흥공로 휘장과 평화우호 휘장을, 호찌민시로부터 휘호, 베트남 국부 호찌민의 고향인 응에안성으로부터 호찌민 휘호를 받았고, 베트남문학회에서 외국인 최초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2014년 10월 12일에는 하노이 수복 60주년 기념으로 하노이시에서 '수도 하노이 명예시민'으로 추대된 유일한 한국인이다. 2017년 11월 20일에는 국립호찌민인문사회과학대학교 개교 60주년 기념식에서 ‘자랑스러운 동문 6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으며, 2018년 12월 베트남 정부로부터 우호훈장을 수훈했다. 조선대학교 교수와 한국베트남학회 회장을 역임한 안경환 교수는 마오쩌뚱, 저우언라이. 체게바라, 시하누크, 훈센, 수카르노, 김일성, 카스트로, 오부치 게이조 등과 함께 베트남 정부에서 선정한 전 세계 “베트남의 친구들” 410명 가운데 한 명으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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