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봉화군에 'K-베트남밸리’ 조성 사업 박차...한‧베 우호관계 발전의 메카로 부상, 한국 거주 베트남 교민의 안식처로 발돋움
[한국지방정부신문=정양기, 이명선 기자] 베트남 최초의 중앙집권적 통일국가인 ‘리(Lý) 왕조’의 왕족 후손들이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그 기막힌 사연에 대해 한-베트남 양국 국민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리(Lý) 왕조’의 왕족 후손으로 알려진 한국의 ‘화산이(李)씨’가 모여 살고 있는 경북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에서 지난 24일 오후 리 타이또(Lý Thái Tổ-李太祖: 974-1028) 동상 제막식이 개최되어 한-베트남 양국의 큰 주목을 받았다.
리(Lý) 왕조는 베트남 최초의 중앙집권적 통일국가 체제를 확립한 왕조로 알려져 있다. 불교 진흥, 법제 정비, 농업 발전을 통해 베트남 중세 사회의 토대를 마련한 왕조로 불교적 색채가 짙은 문화와 예술이 크게 번성했다.
현재의 하노이(탕롱 Thăng Long)를 도읍지로 정하고 정치·군사 중심지를 확립했고 지방 세력을 통제하며 강력한 통일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오늘날 베트남 민족에게 리 왕조는 단순한 옛 왕조가 아니라, 민족 국가의 형성, 불교적 황금기, 자주 독립의 상징으로 민족의 자주성과 번영의 토대를 마련한 자랑스러운 왕조로 인식되고 있다.
수도 하노이를 비롯한 베트남 곳곳에 ‘리 타이또(李太祖)’ 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이 동상들은 베트남 독립정신과 문화적 자부심을 상징하는 장소로 자리 잡고 있다.
이날 제막식에는 호안퐁 베트남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부호(Vu Ho) 주한 베트남대사 등 베트남 정부 관계자들과 하노이 명예시민 안경환 응우옌짜이대학교 총장을 비롯하여 임종득 국회의원, 박현국 봉화군수, 문체부 김현준 국장, 김학홍 경북 행정부지사. 아주경제 곽영길 회장, 화산이씨 종친회 이훈 회장, (사)안용복장군기념사업회 김용만 상임이사, 한국 거주 베트남교민회 회장단, 베트남다문화가정, 봉화군민 등 전국에서 600여 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이 행사에 전국 각지에서 베트남 교민들이 500여 명이 대거 참석하자 숙박시설이 부족한 봉화군은 1박2일 예정된 교민 행사를 24일 당일 행사로만 변경해 진행했다는 후문이다.
경북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에는 봉화군이 추진하는 'K-베트남밸리 다문화커뮤니티센터 건립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고 동상 제막식 후 다문화커뮤니티센터 기왓장을 올리는 행사도 있었다.
한국과 베트남은 약 900년의 장구한 교류역사가 있으며 경북 봉화군에 그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어 그 역사의 발자취를 오늘에 되살려 봉화군을 한‧베 관계의 심장으로 만들려는 박현국 봉화군수의 야심찬 프로젝트가 바로 ‘K-베트남 마을’ 조성 사업이다.
한-베트남 양국 혈연의 주인공인 ‘리(Lý) 태조’의 동상이 경북 봉화군에 제막되면서 봉화군에 ‘대월(大越-리 왕조의 국호)’이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는 베트남 혈연의 뿌리가 3가지 경우가 있다.
베트남 이씨 왕조의 왕자가 고려시대에 정치적 망명을 통하여 한반도에 정착한 정선(旌善) 이씨와 화산(花山) 이씨, 베트남의 막(莫)씨 후손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막(莫)씨 후손에 대해서는 확실한 자료가 발견된 것이 없다.
정선(旌善)이씨의 시조가 된 이양혼(Lý Dương Côn:李陽焜) 왕자가 난국을 피해 12세기에 고려로 망명해 왔고, 13세기에는 화산(花山)이씨 시조가 된 이용상(Lý Long Tường:李龍祥) 왕자가 망명해 한반도에 정착했다.
이용상 왕자의 13세손이 이장발(李長發: 1574-1592)로 봉화군에 있는 충효당의 주인공이다.
화산(花山)이씨 시조 이용상(李龍祥) 왕자의 고려 망명은 리(Lý) 왕조 패망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리(Lý) 왕조 6대 영종(1138-1175)이 세 살에 왕위에 올랐고 그 뒤를 이은 7대 고종(1176-1210) 역시 세 살에 왕위에 올랐다. 이때 충신 또히엔타인(Tô Hiến Thành: 蘇憲誠)이 어린 왕을 잘 보필하여 정치가 안정되었으나 또히엔타인이 사망하자 간신배가 득세했다.
간신들의 부추김에 고종은 정사를 게을리하고 궁궐에서 연회를 자주 열어 재정은 파탄되었다. 관리는 부패하였고 농민 수탈이 심해지자 민란이 발생했다.
이에, 민란을 피해 지방 세력가 쩐리의 집에 피신한 태자는 쩐리의 딸과 결혼하였고, 쩐리는 사병을 이끌고 민란을 진압하고 고종과 자기 집에 머물던 태자를 환궁시켰다.
1년 후 고종이 병사하자 16세의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혜종은 병약하여 3년 만에 7세의 둘째 딸 펏낌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실권자인 쩐리의 4촌 동생 쩐투도는 왕권을 빼앗기 위하여 어린 여왕과 8세의 당질 쩐까인(Trần Cảnh)과 결혼시켰다. 그리고 어린 여왕에게 남편에게 왕위를 넘겨주도록 했다.
리(Lý) 왕조가 망하자 6대 영종의 아들이자 7대 고종의 동생 이용상 왕자는 제기와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남송과 금나라를 거쳐 육로와 해로를 따라 1226년에 고려 황해도 옹진군 화산리에 도착했다.
이들은 옹진군 지역을 침략한 몽골 군사를 막아 내었고, 고려 고종은 이용상 왕자에게 ‘화산군(花山君)’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30리의 토지와 2,000명의 백성을 하사하여 조상을 모시며 살게 했다. 이렇게 이용상 왕자는 한국 화산(花山)이씨 시조가 되었다.
경북 봉화군에 임진왜란 때 만 18세의 나이로 ‘문경(聞慶)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한 화산이씨 13세손 이장발(李長發)을 기리기 위해 1750년경에 건립한 충효당(忠孝堂)이 있다.
호안퐁 베트남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축사에서 “양국간 우호관계 강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고, 박현국 봉화군수는 기념사에서 “한국과 베트남이 문화로 하나 되는 뜻깊은 날”이라고 경축했다.
한국 유일의 하노이 명예시민이자 베트남 응우옌짜이대학교 총장인 안경환 박사(전 조선대 교수)는 “리 태조 동상은 양국의 깊은 역사적 인연을 기리고 우호 관계를 미래로 잇는 상징으로 세워졌다”며 “특히 베트남 교민 사회와 한국 지방정부가 협력해 건립했다는 점에서 민간 외교의 상징물로도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안 총장은 이어 “베트남에서는 한국이 리 왕조의 후손을 기리고 있다는 사실을 민족적 자긍심과 우호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동아시아 공동 문화권의 전통적 연대감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오늘날 한·베 우호 관계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