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방정부신문=안경환 응우옌짜이대학교 총장] (중략)...숭빠씬은 여전히 노래를 흥얼거렸다. “만약 제가 복이 많아 오빠를 얻는다면, 만약 오빠가 복이 많아 저를 얻는다면...”
숭빠신은 타오짜방을 사랑했고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날 해 거름에 옥수수 파종을 마치고 둘이 앉아 부른 노래가 화근이었다.
“오빠는 발톱의 피를 받아요.
저는 손톱의 피를 받을래요.
밤에 한 병에 섞어서
사람의 맹세로 마셔요.
정말로 아름다운 사랑의 징표로…”
베트남 여류소설가 도빅투이(Do Bich Thuy)가 2015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영주(chúa đất, 2015)>에 나오는 구절이다. 필자가 2022년 번역해 출간한 <영주>는 사랑의 맹세를 노래한 것이 사단이 되어 일어나는 영주에 대한 민초들의 항거 이야기가 긴박하게 전개된다.
여류소설가 도빅투이는 베트남 53개 소수민족 가운데 몽족 출신으로 1975년 하장성에서 출생한 페미니스트다. 베트남 국방부 산하 잡지 <군대문예>의 부편집장을 역임하고 창작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19세에 단편소설 <회색 구슬 목걸이>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베트남소수민족예술문학연합회 산문 1등, 하노이 예술문학 연합회 소설 1등 등 베트남 문학계에서 유수의 문학상을 다수 받았다.
도빅투이는 자신의 대표 소설 <영주>를 통해 성차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차별에 항거하고자 했다.
작품 속 영주는 처형 도구인 돌기둥을 앞세워 백성을 공포로 다스리며 강제로 여성을 취하는 등 무자비하게 백성을 수탈하고 민초들은 이에 맞서 항거하는 서사다. 여성이 남성의 노리갯감으로 여겨졌던 시대에서 여성이 독립적 존재임을 역설적으로 주장한다. 베트남 하장성 소수민족의 향토색 짙은 전통 모습과 함께 사회주의 베트남의 국가 정체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작품을 통해 포악한 우두머리 숭쭈어다의 사악함을 고발하고, 남성 중심적인 사회구조에 저항하여 성평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글은 잔잔한 음악을 듣는 것처럼 부드럽게 써 내려가는 문체가 돋보인다.
<영주>의 배경이 된 베트남 하장성(Hà Giang)은 세계 배낭족이 가보고 싶어 하는 세계 20대 여행지 가운데 4위에 올라 있다. 중국과 국경선을 마주한 베트남 최북단의 하장성은 2025년 7월 1일 뚜옌꽝성과 병합되었다.
중국의 장족 자치주인 윈난(雲南)성, 광시(廣西)성과 274km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교통 접근성이 좋지 않아 가난한 산악 지역이다.
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전 63개 행정단위 가운데 인구 면에서 48위, 소득이 가장 낮은 여섯 개 성에 속했었다.
성도(省都) 하장시는 하노이와 320km 떨어져 있고, 동양의 알프스산맥이라 할 정도로 산악지방의 위용과 겨울에는 상고대로 인한 설경을 자랑하기도 한다.
하장성에는 베트남 동북부 최고봉인 서곤령(2,419m)이 있고, 희귀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생태 자원의 보고다.
특히 1,000여 종류의 약초 생산지로 유명한 지방이며, 20여 종족에 인구는 약 93만 명으로 몽족(32.9퍼센트), 타이족(23.2%), 자오족(14.9%), 비엣족(12.8%), 눙족(9.7%) 순으로 분포되어 있다.
소설 <영주>는 하장성 옌민현 드엉트엉 지역에 약 200년 전에 살았던 포악한 우두머리 숭쭈어다에 대한 이야기다.
숭쭈어다는 사람들을 처형하기 위해 돌기둥을 세웠다. 숭쭈어다에게 첩이 여럿 있었는데, 의처증이 심해서 외출을 철저히 금했다.
어떤 남자든 자신의 여자와 문제가 얽히면 남녀를 모두 좌우로 구멍이 뚫려있는 높이 약 1.9m 돌기둥에 매달아 처형했다.
아편 중독, 의처증, 성도착증(性倒錯症), 여성편집증자, 성격장애자 숭쭈어다는 얼굴이 반반하거나 노래를 잘하거나 뭔가 구미가 당기는 여성은 관아로 데려와 자신의 노리개로 삼았다.
그래서 이 지역 여성들은 외출할 때 숯 검댕을 얼굴에 바르고 다녔다. 밉게 보이게 단장해야 잡혀가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 <영주>에서 사건의 발단은 결혼을 약속한 타오짜방과 숭빠신 아가씨가 옥수수 파종을 하고 해거름에 밭두렁에 앉아서 부른 사랑의 노래가 화근이었다.
말 타고 지나가던 영주가 산 위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고 두 남녀를 내려오라고 했다. 숭빠신을 보고는 자신의 첩으로 삼기로 하였다.
영주의 첫째 부인은 결혼 예물을 가져가서 자신과 같은 불행한 여인이 또 생기는 것이 안타까워 숭빠신에게 물에 빠져 죽은 체하고 멀리 도망가서 살라고 귀띔하였다.
그러나 도망가면 부모의 안위가 걱정되어 숭빠신은 마음에도 없는 영주의 첩이 되기로 한다. 영주는 혹시 생길지 모를 후환을 없애려고 숭빠신의 정혼자인 타오짜방을 돌기둥에 매달아 처형하였다.
그러나 죽은 것은 타오짜방이 아니라 타오짜방과 쌍둥이인 동생 타오짜뽀였다. 부모를 더 잘 모시는 형이 살아남아야 한다며 동생 타오짜뽀가 형 대신 죽음을 자청한 것이었다. 부모를 위해 동생이 희생양을 자처한 것이었다.
영주는 타오짜방에게 쌍둥이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동생 타오짜뽀를 타오짜방으로 알고 처형한 것이다.
동생이 자기 대신 처형당한 것을 알게 된 타오짜방은 동생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복수를 다짐한다.
숭빠신과 영주의 결혼식 날을 거사 일로 잡고, 피로연 음식을 만들 요리사가 무기를 감추고 관아에 입장한다.
잔치가 무르익어 하객과 경호원들이 술에 취하자 관아에 불을 지르고 저항하는 경호원들을 총과 칼로 죽인다.
영주는 처형당한 타오짜방이 되살아 나온 줄 알고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를 묻는다.
이에 타오짜방은 “네놈은 이 타오짜방을 절대로 죽일수 없다, 돌기둥이 하나가 아니라 열 개라도 나를 절대로 돌기둥에 매달 수 없느니라. 알겠느냐?” 하면서 칼을 번개처럼 영주에게 내리 꽂았다.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영주는 처절한 복수를 당했고 피의 결혼식이 되었다.
한편, 큰 마님은 숭빠신에게 도망가라고 귀띔했다는 것을 데리고 간 하인이 고자질하여 처형의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30년간 집안의 대소사를 챙긴 첫째 부인을 돌기둥에 달에 처형하지 않고 친정으로 쫓아 보낸 것은 영주의 큰 은전이었다.
첫째 부인은 시집온 후 처음 나가는 바깥나들이였고 시집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길에 연못에 스스로 빠져 죽었다. 영문을 모르는 누렁이는 큰 마님이 벗어놓은 신발 냄새를 맡으며 울부짖고 있을 뿐이었다.
삶이란 무엇인가? 즐거울 필요는 있는 것일까? 당연히 있다. 사랑받을 필요는 있을까? 당연히 있다. 증오할 필요가 있다면 증오해야 하나? 당연히 해야 한다. 생각이 있다면 그것을 말로 표현하고, 하고 싶은 일은 실천해야 하나? 그렇다.
첫째 부인은 죽기 전에 넷째 부인 방쩌를 부러워했다. 마부와 정을 통하다가 들통이 나서 돌기둥에 처형된 방쩌는 비록 짧은 생을 살았을지라도 자기가 원하는 방법대로 즐겼고, 자신의 방식을 따르는 즐거운 삶에 만족했으며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점을 부러워했다.
결론적으로 영주 숭쭈어다는 불행한 남자였다. 흉악하고 황음무도함이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여성은 남성이 함부로 다루는 노리갯감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여성 역시 행복을 꿈꾸고 누릴 권리가 있으며, 비록 순간을 살지언정 행복이라고 하는 것과 바꾸기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작가는 이야기하고자 했다.
소설 <영주>는 베트남의 소수민족 작가의 대표적인 현대 소설이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면 읽어봐야 할 소설이다.
<편집자 주> '영주' 번역 출간 ‘안경환 총장’ 그는 누구인가?
2022년 베트남 인기 장편소설 <영주>를 번역 출간한 안경환 총장은 충북 충주에서 출생해 한국외대 베트남어과를 졸업하고 베트남 국립호찌민인문사회과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언어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베트남의 외국인 언어학박사 1호다. 수교 이전인 1989년 현대종합상사 주재원으로 호찌민시에 파견되어 신시장 개척에 첨병으로 근무했다. 영산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서 26년간 교수로 재직했고, 정년 퇴임 후 2021년부터 하노이와 호찌민시에 있는 KGS국제학교 이사장을 역임했다. 현재 하노이 소재 응우옌짜이대학교 대외 담당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안경환 총장은 2014년부터 6년간 한국베트남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베트남 정부로부터 친선문화진흥공로 휘장과 평화 우호 휘장을, 호찌민시로부터 휘호, 응에안성으로부터 호찌민 휘호를 받았고, 베트남문학회로부터 외국인 최초로 문학상을 수상했다. 2014년 하노이시가 추대한 전 세계 12명의 ‘수도 하노이 명예시민’ 가운데 유일한 한국인이다. 2017년에는 국립호찌민인문사회과학대학교의 ‘자랑스러운 동문 6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으며, 2018년에는 베트남 정부로부터 우호 훈장을 수훈했다.
안경환 박사는 2003년 베트남 국보 10호인 호찌민 주석의 <옥중일기>을 시작으로 <호찌민시집>, 베트남 문학사의 정수인 응우옌주의 <쭈옌끼에우>, 여의사 당투이쩜의 전쟁 일기 <지난밤 나는 평화의 꿈을 꾸었네>, 보응우옌잡 장군의 회고록 <잊을 수 없는 나날들>, 마이반펀 시인의 시집 <재처리 시대>, 여류소설가 도빅투이가 하장성을 배경으로 한 중편 소설 <영주>, 15세기 인물로 전략가이자 민족 영웅인 응우옌짜이가 쓴 <빈응오다이까오> 등을 번역하여 가장 많은 문학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생활 베트남어회화》, 《행복한 한-베 다문화가정을 위한 길잡이》, 베트남의 모든 것 《오늘의 베트남》 등을 저술하고 《몽실 언니》를 베트남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한편, 2015년 발표된 베트남 인기 장편소설 <영주>는 2022년도에 한세예스24문화재단에서 아시아를 빛낸 문학작품을 한국에 소개하려고 번역 지원하고 출판한 책이다. 한세예스24문화재단은 한세예스24홀딩스의 김동녕 회장이 사재를 출연하여 2014년 4월 출범한 공익재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