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신 (사)호남소사이어티 공동대표
박영신 (사)호남소사이어티 공동대표

[한국지방정부신문=박영신 호남소사이어티 공동대표] 몇 년 전 강동완 전 조선대학교 총장과 식사 자리에서 강 총장은 자신도 장흥 출신이라며 소위 ‘장흥정신’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장흥읍에는 녹두장군 전봉준 등 동학지도부가 모두 체포된 이후에도 동학농민군이 끝까지 항전했던 보국안민과 척왜척양의 정신이 살아있고 역사적 가치가 충분한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이 있다.

고요한 동방의 나라, 봉건주의 어둠 속에 묻혔던 130여 년 전에 농사짓던 농민들의 입에서 어떻게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는 이런 고귀한 사상을 주창하며 봉기할 수가 있었을까?

동학군이 점령한 전주성의 경기전에 앉아 전봉준이 직접 써서 조정에 올린 8개 항의 폐정개혁안은 가히 혁명적이다. 탐관오리를 응징할 것, 노비문서를 불태울 것, 과부의 재가를 허용할 것, 무명잡세를 폐지할 것, 관리채용에 지벌을 타파할 것,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할 것, 왜와 내통한 자를 엄벌할 것, 기존의 고리사채를 무효화할 것 등이다.

이처럼 지배계층의 착취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일어선 동학의 근본이념이 평등사회를 꿈꾸며 봉건사회를 타파하며 일본과 서양을 동시에 배척하는 자주적인 사상으로 시작됐다. 동학이란 서학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동학군의 세력은 산과 들을 덮어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동학혁명은 최초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권력남용과 무리한 세금 착취로 농민들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 이에 항거하기 위해 시작되었지만, 이후 충청, 경상, 강원도 등의 농민들도 합세해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확산된다.

동학농민혁명은 비록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지만, 후에 일제에 대항한 독립운동으로, 다시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우리 민족사의 위대한 사건이었다.

장흥에는 이렇게 동학혁명 최후, 최대의 격전지 중 하나로 꼽히며 15일 동안 맨손에 죽창들고 항전했던 장흥 석대들 전적지는 물론이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안중근 의사를 숭모하는 사당이 1995년에 민간인 주도로 건립되었는데 그것이 곧 ‘해동사’로 장흥군 장동면에 위치해 있다. 바로 그 부근에 지난 3월 26일 장흥군에서 안중근 의사 추모역사관을 개관하게 됐다.

조선침략의 원흉이며, 조선 초대통감이자 일본국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역에서 3번의 통렬한 총성을 울리며 전 세계만방에 대한독립의 서막을 선포하는 탕! 탕! 탕! 그리고 도주하지 않고 곧바로 만국공용어로 ‘꼬레아~우라~’ 이어 한국어로 대한국 ‘만세~’ 삼창으로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거사일 당일까지도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사진을 구하기도 쉬운 때가 아니었거니와 지금처럼 언론매체를 통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알지 못했던 안 의사는 대충 인상착의만 듣고 하얼빈역 잠입에 성공했지만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때, 워낙 많은 수행원들 속에 함께 있는 관계로 도저히 누가 이토 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체념하던 순간, 현지 일본인 환영객 중 누군가가 이토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준 덕분에 이토의 얼굴을 확인한 후 권총 3발을 저격했고 그 주위의 일본측 인물도 혹시 몰라 4발을 저격했다.

이토를 향해 발사됐던 제 1탄 2탄 3탄 모두 이토의 급소를 맞혔다. 평소 안 의사는 얼마나 총을 잘 쏘았는지 명중률이 고작 50%가 채 안되는 화승총으로 20보(약 10미터)나 되는 곳에 놓인 동전을 맞혔다고 한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친분이 있었던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안중근을 안씨 집안의 총 잘 쏘는 청년으로 묘사하였다.

봄철 꽃구경도 좋지만 장흥에 한번은 들려서 옷깃을 여미며 님들의 넋을 위로하고 님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려야 할 것이다. 님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헛되이지 않도록 올바른 역사인식을 바로 세우고 추락한 국격과 국민의 삶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장흥정신’ 아니겠는가?

1909년 10월26일 9시30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는 이듬해인 1910년 일제에 의해 사형이 언도 되자 변호사의 권유를 뿌리치고 항소를 포기했다. 살아있는 생명체가 본능적으로 잡고 싶어하는 생명애착에 대한 본성을 저버리고 대의를 택한 데는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사형 언도 소식을 들은 조마리아는 아들 정근,공 근 형제에게 손수 지은 수의와 함께 간결하고 단호한 편지를 보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맘 먹지 말고 죽어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이마도 이 편지는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대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다시 나오거라.”

놀랍다! 단단하고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글이다. 필자는 언제나 이런 글을 써볼 수 있을까? 죽음보다 더 강한 글이다. 아니 죽음을 뛰어넘는 죽음을 이기는 글이다. 자식을 얼마나 사랑 하셨기에 어머니가 이런 글을 쓰실 수 있단 말인가. 감히 ‘극단적인 사랑’이란 표현을 해본다. 성부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셨던 성자 예수님을 죽이셔야만 했던 그 극단적인 사랑, 바로 그 것 아니겠는가?

“딴맘 먹지 말고 죽어라”는 어머니의 편지를 읽은 안중근 의사의 심경은 어떠하셨을까? 사랑하는 아들이 죽기를 바라는 어머니가 이 세상천지 어디에 계시겠는가? 안중근 어머니 역시 사랑하는 아들이 살기를 그 누구보다 더 간절히 바라셨을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 어머니는 비겁하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듯한 인상을 주지말고 차라리 대의를 위해 깨끗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이 잠시 죽은 것 같지만 영원히 사는 길로 인도하신 것이다. 그리고 부활신앙을 믿고 계셨다. 이렇게 확신에 찬 글을 필자는 도대체 언제쯤 써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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